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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역사기행 ①>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2008년 07월 14일 (월) 13:29:00 청소년연합 youthunion@paran.com

 

 

   
 

1880년대 전반 외래종교로 이 땅에 들어온 개신교는 한국민족주의의 전개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개항 이후였기 때문에 1백년 먼저 들어온 천주교처럼 격렬한 탄압에 직면하지는 않았지만 토착민족주의 세력은 개신교에 여전히 거부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개신교 선교사들이 한국에 전파한 서구식 제도와 민주주의 사상은 근대민족주의가 싹트고 성장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선교사들이 설립한 교회와 학교를 통해 많은 민족 지도자들이 배출됐으며, 자유와 평등, 자주 사상이 대중에게 전파돼갔다.

1919년의 3․1운동은 개신교가 한국민족주의운동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계기가 됐다. 개신교는 천도교-불교와 함께 3․1운동에서 지도적 역할을 담당했으며, 전국 각지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독립만세 시위 중 상당부분이 개신교자들에 의해 주도됐다. 그만큼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 의한 피해도 많았는데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경기도 화성군의 제암리교회 이다.

일제 경찰은 1919년 4월 15일 오후 제암리교회에 신자들을 모이게 한 후 문을 폐쇄하고 교회에 불을 지르면서 무차별 총격을 가했으며, 이 때문에 23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는 4월 5일 발안지역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제암리교회에 대한 무자비한 보복이었다.

1905년 8월 제암리 이장이었던 안종후의 주도로 설립된 제암리교회는 동족부락이라는 특성 때문에 유난히 강한 단결력을 지녔는데 3․1운동 때도 이같은 성격은 그대로 나타났다.

일제 경찰은 이어 제암리의 가옥 30여채를 불태우고 5백m 떨어져 있는 고주리에서 천도교 신자6명을 살해하고 시체를 불태워버렸다. 이같은 만행으로 이날 제암리 일대에서는 사람과 가옥, 가축, 의류, 곡식 등이 타는 냄새와 연기가 10여km 밖까지 펴져 나갔다고 전한다. 제암리교회 학살 사건이 일어난 후 신자나 일반인들은 일제의 감시 때문에 사건 현장에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결국 희생자들의 시신은 사건을 전해들은 캐나다 의료선교사 스코필드박사가 며칠 후 불탄 교회에서 유골을 수습하여 인근 공동묘지입구에 묻을 때까지 방치됐다.

제암리교회는 1919년 7월 자리를 옮겨 다시 건립됐고, 1938년 현재의 위치에 기와집 예배당이 만들어졌지만 학살사건의 진상규명은 광복 후 기다려야 했다. 1959년 4월 사건현장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로 된 【3․1운동 순국기념탑】이 세워졌고, 1970년 9월에는 일본의 기독교인과 사회단체들이 속죄의 뜻을 담아 보내온 1천만엔의 성금으로 새 교회와 유족회관이 건립됐다. 또 1982년 9월 정부에 의해 대대적인 유해 발굴 작업이 실시돼 교회 옆에 마련된 묘소에 안장됐으며, 다음해 7월 기념관과 새 기념탑이 세워졌다.

 

   
 

제암리 학살 은폐기도 (아사히신문)

3.1운동 당시 일제가 제암리 학살 사건 등을 은폐하도록 모의한 과정 등을 기록한 당시 우쓰노미야 조선군사령관의 일기가 발견됐다고 아사히 신문이 보도했다. 도쿄 양윤석 특파원의 보도입니다. 우쓰노미야의 일기에서는 우선 제암리 사건 은폐 과정이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 "사령관 자신이 모르는 사이 서울 남쪽에서 일본군 병사가 조선인 30여 명을 교회 안에 가두고 학살, 방화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실을 사실대로 처분하면 가장 간단하지만 학살·방화를 인정하면 일본 제국의 입장이 엄청나게 불리해진다." 이 때문에 " 4월 18일 간부들과 협의에서 저항했기 때문에 살륙했다며 학살·방화를 시인하지 않기로 결론짓고 회의를 마쳤다"는 것이다. 또 사건에 관련된 중위는 진압 방법이 적절하지 않았다며 30일간 무거운 근신 처분을 내렸다고 적고 있다. 일제 스스로도 3.1운동의 무자비한 진압에 대해 잘못을 인정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우쓰노이먀는 또, 3.1운동은 기독교 신자와 민족종교인 천도교 신자, 그리고 학생들이 주도하고 외국인 선교사들이 후원한 것으로, 조선 민중 봉기의 뿌리는 일제의 무단통치라고 분석했다. "납득할 수 없는 부녀자와 결혼시킨 것이나 다름없는 무단통치에 조선인들이 원한을 갖고 소요를 일으킨 것은 당연했다"며, 자신은 독립운동가들과 만나 회유공작을 벌이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한일 역사 연구가들은 제암리 사건의 은폐 과정 등을 담은 우쓰노미야의 일기는 일제 식민 지배의 실태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하고 있다. (2007.2.28)

제암리 사건에 대한 당시 주한 미 영사들의 보고서

1) 주 서울 미국총영사 보고

1919년 5월 12일
제목 : 제암리에서의 일본군에 의한 한국인 37명 학살과 촌락 파괴
국무장관 귀하 :

저의 1919년 4월 23일자 보고서 제35호에서 보고드린 바와 같이 저는 여기 총영사관의 커티스 영사를 제암리에 출장시켜 일본군이 촌락을 불태웠고 30명을 학살하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다음에 들어온 소식에 따라 일본군은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을 마을 교회에 모이도록 하여 교회 내에서 35명을 학살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35명 가운데 기독교인은 10명이며 천도교인이 25명이었습니다. 이밖에도 교회 안에 갇힌 남편을 구하려던 부인 2명이 노상에서 사살되었습니다. 경찰의 보고로 커티스 영사의 제암리 출장 사실을 알게 된 총독부는 커티스 영사의 귀경 1, 2일 후에 외사담당관 히사미즈(久水)를 미국 총영사관에 보내 커티스 영사에게 현지에서 견문한 바를 솔직히 모두 이야기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커티스 영사가 저의 보고서 제35호에 언급된 내용을 간추려 말하여 주니 히사미즈는 제암리사건의 일본 경찰 보고는 커티스 영사의 말과는 다르다고 말하면서 불행히도 경찰 보고를 전적으로는 믿을 수 없다고 말하고, 부하의 행위가 조사의 대상이 되어 있을 때에는 육군 장교의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후에 마쓰나가 지사와 총독부 내무장관 우사미(宇佐美勝夫)와 친분이 있는 선교사 몇몇이 이들과 접촉하여 집과 농기구와 식기와 식량을 몽땅 잃은 마을 사람들의 구제책을 논의하였습니다. 총독은 선교사들이 기독교인 농민들을 도와주는 것은 좋으나 그밖의 농민은 일본 적십자에 구제책을 청구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선교사들은 일본 경찰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파괴된 마을을 찾아가 볼 수 있다는 언질을 받았습니다.수일 후 선교사 대표[2명의 미국인 선교사 노블 박사와 헤론 스미스(Frank Herron Smith, 북감, 일본인 선교 담당 목사)], 그리고 영국인 선교사(R. A. 하디)와 하세가와(長谷川好道) 조선총독 사이에 면담을 가졌습니다. 이 자리에서 감리교회(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선교사로서 27년간을 한국에서 봉직한 노블 박사는 하세가와 총독에게 자기가 직접 제암리에서 본 일과 자기가 개인적으로 안면이 있으며 선교활동을 한 제암리의 기독교도 부인들의 진실된 목격담을 전하였습니다. 노블 박사가 한 말은 커티스 영사가 저에게 보고한 내용과 거의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노블 박사는 제암리에서는 일본 정부에 대한 어떤 반항 선동도 없었으며, 일본군이 제암리를 파괴하고 마을사람을 죽이게 된 구실로 내세우는 일본 헌병의 한국인에 의한 타살은 제암리에서 14마일 떨어진 곳에서 발생하였다는 것을 하세가와 총독에게 말하였습니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흐른 후 하세가와 총독은 노블 박사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진실이라고 말한 후 제암리 사태에 깊은 유감의 뜻을 나타내며, 관련 부대의 장교와 사병들은 처벌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총독은 앞으로는 그와 같은 잔학 행위는 없을 것이라고 엄숙히 선언하였습니다. 그는 거듭 마을사람의 학살이나 마을의 파괴를 명령한 적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제암리외에 18개 마을에서도 제암리에서와 같은 잔학 행위가 없었더라면 총독의 이 마지막 말은 더 큰 무게를 지닐 수 있었을 것입니다. 커티스 영사가 제암리를 직접 찾아가 일본군의 잔학한 행위를 널리 알린 후에야 총독은 뉘우침을 보인 것입니다. 총독부는 공식 사과의 표시로 매우 소규모의 구제대책을 세우고 있으며, 노블 박사에게 35명의 마을사람들이 계획적으로 살해된 감리교회 재건에 쓰라고 1,500엔(750달러)을 주었습니다. 커티스 영사가 직접 제암리를 찾아가 진상을 밝히기 전까지는 일본측이 내세운 37명의 학살과 마을을 파괴하게 된 구실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즉 경찰이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을 마을 교회로 '초대'하여 호의적인 상담을 가지려고 하였던 바, 그들이 모두 모였을 때 몽둥이와 지팡이 등으로 일본 군인을 공격하였고 이 혼란 통에 석유 램프가 엎드러져 교회에 불이 붙고 이 불 때문에 많은 사람이 타 죽고 어떤 사람은 탈출하려다 총에 맞아 죽고 어떤 사람은 일본군과 싸우다가 일본군인이 정당방위로 쏜 총에 맞아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18개 마을의 파괴의 자세한 진상과 학살된 한국인의 수 등은 지금 알 수가 없습니다. 그 까닭은 이 지역의 주민들은 일본 경찰과 헌병의 혹독한 위협 하에서 자기들이 알고 있는 외국인조차도 가까이 오지 말도록 간청하여 그들과 접촉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외국인과의 접촉이 알려지면 즉시 체포되어 저의 1919년 5월 9일자 보고서 제42호에서 보고 드린 '경찰 약식 재판'(즉결처분)에 회부될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2) 주 서울 미총영사 앨런 버그홀쯔의 보고

1919년 4월 23일
제목 : 일본군 교회 내에서 한국인 37명을 학살
국무장관 귀하 :

서부 한국의 부유한 수개 촌락이 일본군에 의하여 소실되고 마을사람들 가운데 많은 기독교인이 일본군에게 사살되었다는 보고에 접한 저는 마을 사람들의 운명에 더 큰 관심을 보이는 선교사들의 간섭을 받지 않고 이 보고 내용의 진위를 직접 확인케 함이 현명하다고 판단하여 커티스 영사에게 언더우드 씨의 자동차편의 제공을 받아들여 파괴된 촌락 가운데 하나라고 하는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수촌마을을 방문토록 명령하였습니다. 커티스 영사는 수촌에 도착하지는 못하였습니다만 저는 장관님에게 서울에서 약 50마일 떨어진 남녀 아동 등 200명의 주민이 사는 약 50가구의 제암리에서 알아낸 사실에 관한 커티스 영사와 언더우드 씨의 1919년 4월 21일자 보고서의 사본을 각각 발송할 수 있음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상황은 다음과 같았던 것 같습니다. 즉 이 달 16일에 일본군 제78연대 사병들이 제암리에 들어와 남자 기독교도들을 모두 마을 교회에 모이도록 명령하였습니다. 그 마을의 교회는 감리교의 교회였습니다. 커티스 영사는 보고서에서 "남자 기독교인들이 모두 교회에 모이자 일본군은 그들에게 일제히 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본군은 사격을 가한 후에 총검과 군도로 생존자를 죽였습니다. 질문을 받은 마을사람은 희생자가 약 30명에 이를 것이라고 말한 바, 이 숫자는 마을 주민수를 감안할 때 설득력 있는 숫자라고 믿어집니다. 학살이 끝난 후 교회에 방화하였으며 불길은 마을의 낮은 곳으로 번져 나갔습니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 후에 입수한 소식에 따르면 모두 37명이 교회 안에서 학살된 바 이 가운데 2명은 남편을 좇아 들어간 부인이었다고 합니다.제암리와 같은 운명을 당한 마을이 14개나 더 있다고 합니다. 주서울 미국 총영사 앨런 버그홀쯔

3) 주 서울 미 총영사관 커티스 영사의 1919년 4월 21일자 보고서

주서울 미국 총영사 앨런 버그홀쯔 귀하 :

일본 경찰 헌병 및 군인이 여러 촌락을 송두리째 파괴하여 버렸다는 여러 정보원으로부터의 보고를 입수하신 귀 관의 명에 따라 본인은 이러한 보고의 진위를 가리기 위하여 1919년 4월 16일 수원지방으로 출장하였던 바, 이에 출장 보고서를 제출합니다. 저희 일행은 AP통신의 서울 특파원 A. W. Taylor, 서울의 미국인 선교사 H. H. Underwood 및 Taylor 특파원의 운전수 임(Yim)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저희 일행은 언더우드 씨의 자동차로 갔으며 언더우드 씨가 직접 운전하였고 한국어 통역 역할도 하였습니다. 저희 일행의 목적지는 수일 전에 전부락이 완전히 소실되고 전주민이 학살되었다는 보고가 있었던 한국 이름 수촌, 일본 이름 스이손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 마을에 가기 위하여 철도를 따라 남으로 나 있는 큰길을 오산까지 갔습니다. 이곳에서부터 우리는 정서방으로 길을 잡았습니다. 수촌에서 가장 가까운 장이 서는 고장인 발안장에서(일본 이름 하쓰안초) 3∼4마일 못미쳐서 우리는 점심을 먹었습니다.이 지점에서 우리는 계곡 너머로 발안장을 바라볼 수 있었는데, 발안장에서 1마일 못미치는 지점의 낮은 구릉 뒤에서 꽤 많은 연기가 오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점심을 먹는 동안 언더우드 선교사는 언덕 밑의 몇채의 민가로 다가가 그 지방에서 있었던 일에 관하여 주민들에게 물어보고 특히 그 연기에 관하여 물어보았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질문을 받은 주민은 각하에게 보고된 바와 같은 사건들이 몇 건 발생하였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감히 읍에 나가지 않으며 또 집에서 멀리 떨어진 밭에도 안 나갔기 때문에 자세한 이야기를 하여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 주민의 말에 따르면 우리 일행이 보고 있는 연기는 전날, 즉 4월 15일 오후부터 불타기 시작한 발안장에서 1마일 떨어진 제암리에서 나는 연기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점심 후 우리는 발안장으로 향하였으나 마을 앞의 꽤 큰 내에 다리가 없어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차를 임씨에게 맡기고 인력거를 구하려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 일행이 읍내에서 맨처음 지나간 건물은 경찰서였는데 그 안에는 78연대의 사병들이 서 있었습니다. 이 병사들은 몇 분 후에 곧 행군을 시작하였는데 목적지는 다음 장터인 남양이라는 곳이었습니다. 경찰서 정문 앞을 몇 발짝 지났을 때 경관이 우리를 불렀습니다. 우리 일행은 뒤돌아 서서 경찰서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서장인 듯한 인물에게 신분증을 제시하였습니다. 통상적인 인사 교환과 다리와 물길이 불량한 상태에 관한 몇 마디가 오고 간 후 저는 근처에 소요가 있었는지를 물었습니다. 서장은 약간 있었으나 지금은 평온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이에 저는 우리 일행이 본 연기 이야기를 하면서 꽤 큰불이 있었던 것 같다고 말하였더니, 그는 전날에 근처 마을에 불이 났다는데 그리 큰불은 아니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잠시 후 저는 우리 일행은 읍내를 좀 돌아보고 싶다고 말하고 바다가 보이는 곳까지 가보고 아직도 연기가 나는 불 구경을 하고 싶다고 말하였습니다. 서장은 별 반대를 하지 않았으나 단지 언제 불난 자리를 가보고 싶으냐고 반문하였습니다. 서장은 한국인 경관을 시켜 인력거를 마련케 하였습니다. 일행은 인력거로 약 반 마일 간 후에 들을 도보로 약 4분의 1마일 건너 질러서 제암리에 도착하였습니다. 제암리는 낮은 산지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인력거꾼(한국인들임)들은 도중에 언더우드 선교사와의 대화에서 매우 조심스러웠기 때문에 우리는 제암리에서 부딪칠 광경에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했습니다. 인력거꾼들은 그러나 지난 10일 동안에 약 6대의 자동차에 분승한 일본 군인이 이 지역에 들어왔다고 말하였습니다. 서장의 예사로운 태도와 인력거꾼들이 별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일행은 이번의 사태와 아무런 관련이 없을지도 모르는 소규모 화재 현장 아니면 불난 자리라도 보게 되나보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일행은 서장이 소규모의 화재라고 생각하는 불을 볼 수 있게 되었으며 지금 찾아가는 화재는 어제 일어난 것이고 그밖에도 여러 화재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다시 상기하였습니다. 제암리 언덕 모퉁이를 돌아섰을 때 아직도 연기가 나는 부서진 민가 몇 채를 지났을 때만 해도 우리는 이번 참화의 규모를 알리는 것을 아직 발견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누군가가 지키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우리는 조사를 시작하거나 사진을 찍기 전에 마을 한쪽 끝에서 다른 끝까지 걸어가 보기로 하였습니다. 마을의 낮은 부분을 지나갈 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이 마을의 참화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감리교 교회로 판명된 파괴된 건물 앞을 지날 때 본인은 갑자기 건물 마당을 둘러싼 포플러나무 너머로 볏짚으로 반쯤 가리운 불에 탄 시체를 발견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마을 한 쪽 끝에 도달하였을 때 사태의 전모를 한눈에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서 있는 언덕진 지대에는 40∼50채의 한옥이 있었는데 지금은 6채 가량만이 손상을 입지 않고 서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나머지 가옥은 완전히 소실되었으며 초가 지붕을 이은 큰 볏단에서는 아직도 연기가 일고 있었으며 교회 지붕은 아직도 불이 붙어 있었습니다. 벽은 거의 모두 무너져버리고 없었습니다. 흙벽에는 불에 그을린 자취가 여기저기 보였습니다. 약 200야드 저쪽에는 전혀 불에 타지 않은 일군의 가옥이 있었습니다. 마을 밖에는 건져 낸 가재도구가 널려져 있었습니다. 소실된 가옥 위쪽 언덕 위에는 볏짚 단이나 가마니로 만든 집을 잃은 마을사람들의 비참한 임시 처소가 산재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곧 식량난이 닥칠 것이 분명했습니다. 언더우드 씨는 주민 몇 사람에게 이 화재의 원인과 사건의 전모에 관하여 물어보았습니다. 사람마다의 증언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였으며, 특히 그 비극적 사태의 충격으로 거의 넋을 잃은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기에 박진감에 넘쳐 있었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를 종합하여 보건대 사건 전날 일본군이 갑자기 나타나 남자 기독교인은 모두 교회에 집합하라고 명령한 것 같습니다. 남자 기독교인들이 모두 교회에 모이자 일본군은 그들에게 일제히 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본군은 사격을 가한 후에 총검과 군도로 살아 남은 자를 죽였습니다. 질문을 받은 마을사람은 희생자가 약 30명에 이를 것이라고 말한 바, 이 수는 마을 주민 수를 감안할 때 설득력이 있는 숫자라고 믿어집니다. 학살이 끝난 후 교회에 방화하였으며 불길은 마을의 낮은 곳으로 번져 나갔습니다. 불길이 마을 높은 곳으로 번지지 않을 것 같자 고지대의 집에도 불을 질렀습니다. 가재도구를 건지려는 노력을 방해하려던 기도는 보이지 않았으며 일본군은 방화만 하고 그 결과를 끝까지 보지는 않고 떠난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비기독교인의 집들도 소실되었습니다. 마을을 떠나 올 때 우리 일행은 불탄 교회 뜰을 지나왔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불에 탄 또 한 구의 시체를 보았습니다. 마을사람들 말에 의하면 나머지 시체는 아직도 교회당의 불이 붙어 무너져 내린 초가 지붕밑에 깔려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제암리를 떠나 곧바로 장터가 있는 읍에 돌아왔습니다. 인력거꾼들은 우리가 제암리사건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는 돌아오는 길에는 말문을 열었습니다. 그들은 제암리 외에도 약 15개 마을에서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말한 바, 이는 우리가 다른 정보원으로부터 들은 정보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경찰 서장을 다시 방문하여 서울로 돌아간다고 통고하였습니다. 자동차를 지키고 있던 중국인 운전수는 우리가 없는 동안 아무도 차에 가까이 오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일행은 우리가 입수한 보고의 진실성을 입증할 만한 것을 충분히 보았고 밤이 되기 전에 서울에 돌아오기를 원하였기 때문에 원래 계획에 들어 있던 수촌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한국인과의 대화에서 자세한 내용을 실은 언더우드 씨의 보고서 일부를 첨부합니다.

영사 레이몬드 커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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